의식적 탈특화가 의식적 특화보다 더 쉽습니다.

의식적 탈특화가 의식적 특화보다 더 쉽습니다.

제 관찰과 경험에 따르면, 초반에는 원치 않는 영감으로부터의 의식적 탈특화가 원하는 영감으로의 의식적 특화보다 더 쉽습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예를 들자면, ‘나는 머저리다’로부터 의식적으로 탈특화하는 것이 ‘나는 천재다’로 의식적으로 특화하는 것보다 쉽단 뜻입니다.

왜냐하면, 시점이 ‘나는 머저리다’로 가득하면 새로운 영감이 페이지에 닿기가 어렵기 때문입니다. 흰 페이지에 아주 아주 아주 여러 문장이 검은 글씨로 쓰여 있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나는 머저리다’가 1,000,000,000,000번 쓰여 있는 거죠. 이때, 그 검은 글씨를 녹여낸 후에 빈 페이지를 새로운 영감으로 채우는 게 더 쉽습니다.

심지어 ‘나는 머저리다’라는 영감을 1,000,000,000,000번 쓴 것을 다 녹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만 녹여도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녹임으로써, 빈 페이지에 아주 매우 작은 공간이 생깁니다. 그 빈 페이지에서 우리는 이야기꾼과 닿을 수 있습니다.


의식적 탈특화가 의식적 특화보다 더 쉬운 또 다른 이유는, 의식적 특화라는 행위는 아예 필요하지도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이 ‘나는 머저리다’로부터 탈특화를 했으면, 그 사람은 ‘나는 천재다’라는 새로운 영감을 적용하려고 별로 그렇게 노력을 많이 할 필요가 없습니다. 빈 페이지를 채우려고 특화를 고를 필요도 없습니다. 유일한 현실이었던 ‘나는 머저리다’를 그저 없앰으로써, 그 사람은 머저리도, 천재도 될 수 있는 사람이 됩니다.

‘좋은’ 쪽으로 특화하려고 하는 건 꼭 좋지만은 않습니다. ‘좋음’에 대한 집착은 ‘안 좋음’에 대한 저항과 함께 오니까요.

예를 들어, ‘나는 천재다’로 특화하려는 시도 중, ‘이런, 내가 머저리일까 봐 완전 겁나네’라는 덫에 빠질 수도 있습니다. 사실, 우리가 어떤 시점 특화를 갖고 있는지를 정확히 모를 때 딱 이런 현상이 발생합니다. 이전 포스트에서 말했던 것처럼, 건강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병에 대해 이야기하고, 돈을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부유한 자들이 얼마나 나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더 나은 뭔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주장하면서 관계란 얼마나 공포스러운지에 대해 얘기한단 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의식적 탈특화가 의식적 특화보다 더 쉽습니다. 또한, 원치 않는 영감으로부터의 탈특화에는 부작용이 적습니다. 게다가, 일단 원치 않는 영감(나는 머저리다, 나는 계속 병에 걸린다, 나는 돈을 가질 자격이 없다, 내가 만나는 사람마다 바람을 피운다)으로부터 탈특화를 하면, 빈 페이지의 ‘진짜성’은 너무나 진실이 되어서 (즉, ‘그냥 안다’는 느낌이 와서), 특화 과정들이 상당 부분 저절로 펼쳐집니다. 집착스러운 움켜쥠 없이도요.

이 마지막 부분, ‘집착스러운 움켜쥠 없음’은 왜 그런가 하면, 이야기꾼의 존재를 너무나 알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좀 상관이 없어집니다. 정말이지, 별로 상관이 없습니다.

예를 들어, 어느 날 제가 어떤 관객 앞에서 머저리처럼 비춰졌다고 칩시다. 근데 뭐, 그래서 뭐 어쩌겠습니까? ‘나는 머저리다’로 시점이 특화된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매우 공포스럽겠죠. 가장 핵심 정체성을 건드리니까요. 하지만 시점이 중립이거나, 시점이 ‘이야기꾼은 날 알아서 보살펴준다’라고 말하는 사람의 경우에는, 진짜 상관이 없습니다. 내가 머저리처럼 보이는 바람에 내 생애 최고의 사랑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고, 머저리만 고용하는 사람에게 고용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 기분이 더 좋아진다든지, 하는 거죠. 가능한 일입니다.) 그렇게 해서 떼돈을 벌어가지고 21살에 은퇴할 수도 있습니다. 뭐든 상관없습니다. 이야기는 아무 방향으로나 풀릴 수 있습니다.

핵심은, 이 상대적 경험들이—부유/가난, 건강/병, 머저리/천재—전부 그저 경험이라는 겁니다.이것들은 이야기의 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한쪽과 매우 강하게 동일시되는 특화를 지니고 있으면, 개별적 씬을 자꾸만 우리 삶의 테마와 의미로 변신시키게 됩니다. 고통에서 허우적대고 싶지 않다고 주장하면서 고통받게 됩니다.

그래서 앞으로 나올 포스트 몇 개에서는 특화보다 탈특화에 집중하겠습니다. (하지만 결국 탈특화와 특화는 함께 작용합니다. 존재라는 것 자체가 탈특화보다는 특화의 방향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계관의 초반에 깔아둔 거대 특화들이 중요합니다.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진정으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