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냥 아는” 느낌.

“그냥 아는” 느낌.

여기까지 읽으셨다면, 이미 주요 시점 특화를 몇 개 고려/승낙하신 상태입니다. 이를테면:

  • 나는 이 아바타이지만, 또한 이야기꾼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야기이자 그 안의 전부다).
  • ‘외부’ 환경은 내 아바타와 그 몸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어 있지 않다.
  •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를 불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실 서로의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관찰과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제 현재 결론은 이렇습니다: 위의 특화에 맞게끔 시점을 특화했다고 생각은 하지만, 사실은 그런 상태가 아닐 수도 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머리로는 ‘안다’고 하지만 심장으로는 전혀 알지 못할 수도 있다.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다른 많은 시점 특화에도 이 점이 적용됩니다.

예를 들어, 나는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긴 쉽습니다. 행복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맺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도 쉽습니다. 건강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기도 쉽습니다.

하지만 진짜 생각은 무엇인가? 시점은 실제로는 어떻게 특화되어 있는가?

잦은 빈도로, 반대 방향으로 특화되어 있습니다. 부를 누릴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부자를 욕한다든지. 행복하고 로맨틱한 관계를 맺을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예전에 실패한 10번의 연애를 자기소개로 말하고 다닌다든지. 건강할 자격이 있다고 말하면서 얼마나 병에 걸리기 쉬운지에 집중한다든지.

게다가 많은 사람들의 경우에, 바람직하지 않은 시점 특화가 있다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합니다.

이 때문에 시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이 그토록 중요합니다. (“시점은 아바타와 이야기꾼이 만나는 곳입니다.”라는 포스트를 다시 한번 참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동시에, 만약 영감에 대한 특화와 탈특화가 그저 머리로 결정해서 될 일이었다면, 이 문제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당연히 머리로는 알죠. 이런 걸 원하고 저런 건 원하지 않는다는 걸.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우리는 바람직하지 않은 시점 특화를 움켜쥐고 있습니다.

왜인가?

그것들이 진짜라는 걸 알아서.

어떻게 아는가?

그 ‘진짜성’을 몸으로 느끼니까.

여기서 ‘느낀다’고 함은, 꼭 감정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감정이란 슬픔, 기쁨, 분노, 두려움 등을 포함합니다. 그런데 느낌은 좀 더 신체적일 수 있습니다. 몸이 떨린다든지, 따끔거린다든지, 가렵다든지, 따뜻하다든지 등등. 느낌은 또한 신체적로으로도 감정적으로도 묘사하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육감 같은 거 말입니다. ‘그냥 아는 느낌’이 드는 것.

시점을 특정 영감들에 대해 특화하거나 탈특화하려면, 이 ‘그냥 아는’ 느낌을 느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까지, 머리로 아무리 이론을 읊어도 그 영감들은 계속해서 이론에나 기댈 겁니다. 한편, ‘그냥 아는 느낌’을 느끼게 되면, 그때부터는 더는 설명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더는 설득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냥 알게 됩니다.

이는 우리가 우리 이름에 대해 갖고 있는 앎과 같습니다.

예를 들어, 저는 한아임입니다. 제가 이 이름을 골랐습니다. 저는 제가 한아임이라는 걸 실제로 알고 있습니다. 만약 누가 와서 저한테 제가 한아임이 아니라고 한다면, 그 사람을 미쳤다고 하겠죠.

다른 예시로, 저는 제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제가 이 글을 지금 쓰고 있단 걸 알죠. 매우 진짜거든요. 저는 이 점을 압니다.

이런 것들이 당연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진짜 당연하니까요. 우리가 진실이라고 알고 있는 모든 것은 우리가 그것이 진실임을 알기에 당연합니다. 닭이 먼저고 달걀이 나중이냐, 달걀이 먼저고 닭이 먼저냐—그런 건 없습니다.

하지만 ‘외부’ 세상이라고 불리는 것과 시점의 동시성은 다른 날에, 훨씬 나중에 다뤄봅시다. (어쩌면!)

일단, 핵심은 이겁니다. 머리로 아무리 ‘이해’해도 소용없습니다. 심장이든 내장이든, 표면 ‘지성’보다 더 깊은 무언가를 통해 어떤 영감의 진실성을 실제로 이해할 때까지, 우리의 시점은 우리가 특화하려고 하는 영감으로 제대로 특화될 수 없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