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은 아바타와 이야기꾼이 만나는 곳입니다.

시점은 아바타와 이야기꾼이 만나는 곳입니다.

시점은 아바타와 이야기꾼이 만나는 곳입니다. 시점이 중간입니다.

소설에서 캐릭터와 소설가가 시점, 즉, 중간에서 만나는 것과 같습니다. 이 시점이란 것은 캐릭터에게 특화되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앞선 포스트들에서 언급되었듯이, 재미를 위해서는—캐릭터에게도, 소설가에게도—어느 정도의 특화됨이 필요한 경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시점이 팽창할 가능성은 늘 있지만, 그러한 가능성들이 늘 직접적으로 경험되지는 않습니다.)

캐릭터의 시점에 없는 것이라면, 소설가는 캐릭터가 그것을 자각하길 기대하지 않습니다. 소설가가 시점에 넣지 않은 것을 캐릭터가 몰랐다고 해서, 캐릭터를 탓하는 소설가는 없습니다.

아바타 세상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야기꾼이 바로 우리 앞에 놓아두었습니다. 그녀는 우리에게 늘 영감을 보냅니다. 우리가 메시지를 눈치채지 못하면, 그것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알아들을 때까지 이야기꾼은 우리한테 메시지를 보낼 겁니다.

이는, 역시나, 소설과 같습니다. (제가 소설 예시를 계속해서 쓰는 이유는, 이 포스트들이 문자로 이루어졌으며, 제가 소설을 쓰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비유는 다른 스토리 매체로 대체할 수 있습니다. 영화 또는 만화책이 그 예입니다.) 우리는 모두, 일반적인 소설 구조에 익숙합니다. 여기서 상황은 점점 ‘더 나빠지는데,’ 캐릭터가 드디어 알아들을 때까지 그러합니다. 캐릭터는 바닥을 찍은 후에, 곤경으로부터 기세등등하게 일어섭니다. 고전적인 해피엔딩입니다.

하지만 그 해피엔딩은 더 ‘나빠지는’ 상황 없이 존재할 수 있었습니까? 대개는 아닙니다.

따라서, 그러한 ‘상황이 나빠지는’ 구조의 일부인 사건들은 실제로 ‘더 나쁘다’거나 ‘나쁘다’거나 ‘최고로 나쁘다’고 할 수 있습니까? 이야기꾼의 입장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하지만 아바타에게는 나쁜 일이 나쁨을 알아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바타가 무언가가 나쁘다고 하면, 그것은 나쁜 겁니다. 현실이란 아바타의 시점 그 자체입니다. 시점 바깥에 객관적인 현실이란 없습니다.


‘상황이 나빠지는’ 플롯라인은 스스로가 소설 속에 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캐릭터들에게 잘 적용됩니다. 자신의 시점이 자신의 것인 만큼이나 이야기꾼의 것임을 자각하지 못하는 캐릭터는 자신이 배경, 다른 캐릭터들, 그리고 이야기 그 자체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여깁니다. 따라서 캐릭터는 보호하기, 싸우기, 투쟁하기 등이 필요하다고 느낍니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이야기에서 펼쳐지는 참으로 많은 일들이 아바타에게는 생명을 위협하는 사건으로 여겨집니다. 즉, 나쁘게 여겨집니다.

하지만 캐릭터가 소설 속에서 깨어난다면? 이야기꾼은 최악 중의 최악의 장애물을 캐릭터에게 던져서 캐릭터를 이야기 세상에서 인도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비슷하게, 아바타 세상의 우리가 아바타 세상에서 할 일은 단 하나, 우리 시점에 주의를 기울이는 것입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은 이미 거기에 있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