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을 이야기꾼의 눈으로 바라보기. 노려보는 거 아님. 어색하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아님. 바라보기임.

시점을 이야기꾼의 눈으로 바라보기. 노려보는 거 아님. 어색하게 뚫어져라 쳐다보는 것도 아님. 바라보기임.

현재의 “추천 자료” 페이지에는 제가 특히 좋아하는 영성 유튜브 채널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쓰여 있습니다.:

심리학, 생물학, 양자 역학, 종교, 영성... '나'에 접근하는 길은 많습니다. 레이블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나'에 접근할 때의 따스함입니다.

다른 이들이 '나'의 객관적, 논리적, 합리적인 가치를 믿어주고 확인해 줄 수 있도록 '나'를 해부 실험대 위에 올려놓고는 그 모든 부분부분을 메스로 조각내는 동안 혹은 그 이후에 연구, 분석, 통계화하는가? 아니면 다른 누가 뭐라고 하든 하지 않든, '나'란 소중히 여길 무언가라는 근본적인 가정을 지니고 접근하는가?

후자의 길을 터주는 체계를 조직함으로써, 하루님은 저를 아마도 수십 년의 괴로움으로부터 구해주셨을 겁니다. 많은 사람들이 ‘보는 시선’에 대해 수천 년을 이야기했지만, 늘 '따스한' 보는 시선을 강조한 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따스하게 보는 시선만 있으면, 뭐가 잘못되는 게 거의 불가능합니다.

그 유튜브 채널을 운영하는 하루님은 이 시선을 “절대 공감”의 시선으로 묘사하십니다.

다른 많은 사람들이 시선을 묘사하는 말도 들어 왔습니다. 모두가 같은 것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하나의 진실을 다양한 모델로 설명하려는 겁니다.

저는 이야기꾼이니까 (아바타 세상 수준에서), 이 시선이란 것이 제가 제 소설 캐릭터들을 대하는 시선과 정확히 동일함을 깨달았을 때 가장 획기적인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이것이 제가 “그대의 이야기꾼은 그대를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라는 포스트에서 설명한 내용입니다.

소설가의 시선은 무조건적입니다. 이야기 속의 모든 것은 있어야 하기에 거기 있습니다. 캐릭터가 스스로를 얼마나 작고, 하찮고, 무능하게 느끼는지는 상관없습니다.

소설가는 그녀의 캐릭터들을 노려보지 않습니다. 캐릭터들을 혐오했다면, 그들에 대해 쓰지 않았을 겁니다.

소설가는 또한 자기 캐릭터들을 어색하게 뚫어져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그 존재들은 그녀로부터 나왔습니다. 어색하게 느낄 게 하나도 없습니다. 그들은 그녀의 피와 살입니다.

소설가와 캐릭터 사이의 거리는 제로입니다. 그 레이블들은 그저 그들이 자신을 소설가와 캐릭터로 경험하도록 해주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리고 이 비유를 느끼기 위해 우리가 말 그대로 아바타 수준의 소설가여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야기란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살아오고 숨 쉬어온 것입니다. 우리는 이야기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모른다고 여길 수도 있지만, 분명히, 반드시, 압니다. 우리 모두가요. 우리는 모두 소설, 영화, 비디오게임, 그리고 음악과 시각 예술에 친숙합니다. (예술은 전반적으로 이야기를 다룹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가 이야기 속에 살 뿐만 아니라, 이야기를 풀어내는 실체와도 연결되어 있음을,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이야기꾼임을 깨닫기만 하면 됩니다. 따라서 우리는 그 무엇과도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그 어떤 배경, 그 어떤 플롯, 그 어떤 다른 캐릭터, 그 어떤 공원의 나무, 그 어떤 바다의 파도, 그 어떤 무엇도 우리가 각자 풀어내는 이야기 속에서 우리와 떨어져 있지 않습니다.


어떤 세계관들은 이 시선을 중립적이라고 묘사합니다. 다른 세계관들은 따스함에 훨씬 더 많이 집중합니다. ‘이야기꾼의 눈’은 후자에 속합니다.

존재 자체가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제가 어떤 이야기를 쓴다면, 그것은 그 자체로 이미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저는 이미 무조건적으로 사랑하고 있습니다. 제가 풀어낼 수 있는 모든 이야기 중, 하필 그 이야기를 하고 있잖아요. 그 이야기에 뭔가 특별한 게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제 이야기꾼에 대해서도 저는 그렇게 느낍니다. 저는 제 이야기꾼에게 특별합니다. 이야기꾼은 저에 대해 중립적이지 않습니다.

짧게 요약하자면: 이 세계관에서, 우리는 바라봅니다. 노려보지 않습니다. 어색하게 뚫어져라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무조건적으로 사랑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느끼는 그것이 딱 우리가 느끼기를 원하고, 느끼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니까요.


이전 포스트에서, “상사가 날 격하게 싫어한다”는 아이디어에 대한 몇 가지 그럴싸한 반응을 나열했습니다:

  • 상사는 다른 동료들만 좋아한다.
  • 인생은 불공평하다.
  • 나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 왜 열심히 일해야 하지? 엿 같네.
  • 닥치고 일이나 하는 게 맞는데.
  • 상사는 머저리다.
  • 동료들은 머저리다.
  • 그냥 은퇴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부자들은 엿 같다.

이제 이야기꾼의 눈이 어떤 느낌인지를 상상해 보았으니—무조건적인 사랑이라는 것—이 반응들을 그녀에게 가져가면 됩니다.

순서대로 할 수도 있고요. 역순서대로 할 수도 있고요. 하나의 반응에 1분 머무를 수도 있고 1시간 머무를 수도 있습니다. 이야기꾼 앞에서 그리하는 한, 뭐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몸을 따라가세요. (몸에 대해서는 다른 포스트에서 더 자세히 말하겠습니다.) 몸은 무엇을 해야 할지 압니다.

앉은 상태로 눈에게 이야기해도 좋고요. 산책하거나 설거지를 하면서 이야기해도 좋습니다. 자기 전이든 깨고 나서든 좋습니다. 아무려면 상관없습니다.

진짜 필요한 건 아바타가 자신의 문제를 이야기꾼에게 펼쳐낸다는 인식입니다. 필연적으로, 아바타도 이야기꾼도 그대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무조건적인 사랑의 존재이기에, 그대는 그녀에게 어떤 방식으로든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그녀를 욕하고, 말하자면 마음속에서 때릴 수도 있습니다. 그녀는 때리는 자보다 거대하지만, 또한 그대가 곧 때리는 자이고 맞는 자입니다. 상관없습니다. 하고 싶은 건 뭐든 하면 됩니다.

그래도 예시를 들자면, 이런 대화가 펼쳐질 수 있습니다. 특히나 스트레스 가득했던 업무 날 이후에 이 대화가 벌어졌다고 해봅시다.

  • 빌어먹을 상사. 이 상사는 아주 못생겼어. 최악이야. 내 기분을 엿 같게 해.
  • 맞아. 그렇구나. 네 상사는 못생겼어. 네 상사는 최악이야. 네 상사는 네 기분을 엿 같게 해.
  • 인생은 참 불공평해.
  • 아하. 그렇게 느끼는구나.
  • 얼마나 더 일을 해야 할까. 아마 과로로 뒤질 때까지 하든지, 그래야겠지.
  • 어쩌면 그래야 할지도 몰라. 그래.
  • 아주 최악이로군.
  • 저런, 아가. 그래, 최악이네.

주고받음이 별거 아닌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다음을 고려해보십시오. 정말 진짜로 고려해 보세요: 그대는 그대 자신의 내적 대화를 얼마나 자주 묵살해버립니까?

예:

  • 저 청바지가 사고 싶어.
  • 안 돼, 그럴 여유가 없잖아. 그러니까 원하지도 마.

예 2:

  • 저 사람이랑 데이트할 수 있으면 좋겠다.
  • 미쳤냐? 넌 무가치하잖아.

예 3:

  • 더 건강해지고 싶어.
  • 누구나 건강 문제를 안고 살아. 더 건강해지는 건 꿈도 꾸지 마.

우리는 지금 당장 이 패턴을 멈출 겁니다. 모든 영감을 이야기꾼의 눈 = 따스한 시선 = 하루님의 용어에 따르면 “절대 공감”으로 바라볼 겁니다. 그 어떤 다른 반응을 보이기 전에, 일단은 우선적으로, 우리 스스로에게 귀 기울일 겁니다. (우리 스스로를 이야기꾼의 눈으로 바라볼 겁니다.)

이 주고받음은 특히나 이야기꾼과 대화하는 초기 단계에 도움이 됩니다. 주고받음을 통해 분리가 형성됩니다.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분리요.) 이 분리를 통해, 우리는 사실 이야기꾼이 존재한다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그녀에게 말하지도 않겠죠.

또 하나 도움이 되는 건 아바타에게 아기스러운 이름을 붙여주는 겁니다. 말 그대로 ‘아가’라고 불러도 좋고요, 별명을 붙여도 좋습니다. 징징대고 싶어 하면 징징대게 두세요. 울고 싶어 하면 몸으로 울게 두세요. 원한다면, 뭘 때리게 두세요. (하지만 다른 아바타를 때리는 건 추천하지 않습니다. 도덕적 이유 때문은 아닙니다. 이야기꾼의 눈은 도덕관념과 꽤나 무관하고, 저는 그대에게 뭐가 도덕적이고 뭐가 그렇지 않은지 일러주려고 여기 있는 게 아닙니다. 그보다는, 아바타 세상을 돌아다니면서 뭘 바꾸려고 하는 게 그야말로 가장 효과적이지 못한 길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모든 것은 시점 수준에서 펼쳐집니다. 시점이 현실입니다. 다른 아바타를 때려야지만 뭔가를 성취해낼 수 있다는 시점을 지니고 있는 건 그냥 실용적이지를 못합니다. 베개든 뭐든 장만하는 게 아마 더 좋을 겁니다. 그걸 때리세요.)


처음에는 내면에서 대화를 이끌어 나가는 게 어색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대 내면에서 “다른 사람들”과 이런 대화를 했던 적이 얼마나 많았는지를 돌이켜 보십시오. 이 대화도 그 대화들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대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도 30년 후에 그대가 할머니와 마음속으로 대화를 한다면, 그 대화는 그대 시점에서 분명 진짜입니다. 아마 그대는 할머니가 ‘진짜로 살아 있다’고 여기진 않겠지만, 대화 자체는 어떠합니까? 두 아바타 사이에서 외부적으로 펼쳐지는 대화와 정확히 동등한 정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상사 예시도 그렇습니다. 만약 그대가 상사와 내적 논쟁을 벌이고 있다면, 그건 그대 시점에서 진짜입니다. 그리고 아바타에게 시점 밖에 무엇이 존재합니까? 아무것도 존재하질 않습니다.

이래서 사람이란 죽는 날까지 다른 아바타에게 화가 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습니다. 그 사람에게 그 화는 진짜입니다.

또한, 이래서 사람이란 50년 전에 죽은 사람과도 여전히 사랑에 빠져 있을 수 있습니다. 그 사랑은 진짜입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