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그것이 아닌, 모델.

실제 그것이 아닌, 모델.

모든 용어는 설명을 위해 존재한다는 점을 다시 한번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용어가 따로 존재한다고 해서 손목을 팔꿈치로부터 절단하면 안 되겠죠. 우리가 원하는 건 제대로 기능하는 팔 전체입니다.

이야기꾼의 눈 세계관 속의 겹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이야기꾼
  • 시점
  • 아바타
  • 몸 + 마음

이 목록의 그 무엇도 다른 것보다 더 좋거나 나쁘지 않습니다. 이들은 전부 협동합니다.

저는 위의 목록을 점점 더 높아지는 대기의 겹이라고 생각하기를 좋아합니다. 이 겹들은 ‘나’라고 부르는 이 다면적이고 다차원적인 것을 에워쌉니다. 분명, 겹치는 부분도 있습니다. 또한, 공기처럼, 부분들이 움직입니다. 멈춤이란 없습니다. 이야기꾼은 아바타에게 ‘침투’하고, 아바타는 이야기꾼에게 ‘침투’할 수 있습니다.

이 모델은 제게 안녕의 느낌을 줍니다. 항시, 이야기꾼과 그녀의 모든 영감이 저를 둘러싸고, 제 주변 공기에 스며들고, 저를 껴안습니다.

때를 가리지 않고요.

또한, 어디서나요.

마찬가지로 어디서나 언제나, 저는 그녀입니다. 그녀가 저입니다.


용어의 한계, 그리고 그와 관련된 모델의 한계로 돌아가 보겠습니다.

저는 소설 비유를 쓰고 있습니다: 캐릭터가 있는 소설을 쓰는 소설가 말입니다. 저는 이 모델이 이야기꾼, 아바타, 시점, 몸, 마음, 플롯, 배경, 기타 등등 사이의 관계들을 본능적으로 묘사하는 데에 유용하며 강력하다고 믿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유용하고 강력해도, 모델이란 실제 그것은 아닙니다.


다음을 상상해 보십시오: 소설 속의 소설이 있습니다.

소설가인 캐릭터에 대한 소설을 제가 썼다고 해봅시다. 그래서 그 캐릭터가 소설을 씁니다. 이 경우, 그 캐릭터는 제 소설 속 캐릭터의 소설로 향하는 제 채널입니다.

선형적 의미에서, 각 소설가는 소설을 쓰고 있습니다. 제가 소설을 쓰고 있고, 제 소설 속 캐릭터가 소설을 쓰고 있죠. 그리고 이런 식으로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속 소설로 끝도 없이 들어갈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비선형적 의미에서 (‘진정한’ 의미에서), 우리는 차원적으로 다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제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의 캐릭터는 알 수 없지만, 저는 아는 것들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약간은 어떤 상황과 비슷하냐면, 저는 3D 세상에 있는데 제 소설 속 소설 속 소설 속 소설의 캐릭터는 1D 세상에 있는 것 같은 상황인 겁니다. 우리는 차원적으로 다릅니다.

이것이 저와 제 이야기꾼 사이의 관계를 제가 상상하는 방식입니다. 제가 제 소설에 할 수 있는 것보다, 그 관계에서 제 이야기꾼은 저를 차원적으로 더 능히 에워쌉니다. '에워싼다'고 함은 이런 겁니다. 제가 소설을 쓸 때 저는 캐릭터가 캐릭터의 이야기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설 속 요소들을 보살핍니다. 예를 들어, 해가 뜨고 지는데, 캐릭터는 이에 대해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지만 제 이야기꾼은 제 이야기에 있어서 백만 배 더 에워쌈에 능합니다. 제가 제 소설에 하는 것보다요.

우리는 우리의 이야기꾼들과 다른 차원에 존재하는데, 이는 바로 아바타로서 우리만이 할 수 있는 것들을 하기 위함입니다. 즉, 이 특정 세상을 경험하기 위함입니다. 이는 우리 아바타 세상의 소설가들이 소설을 써서, 캐릭터를 통해 소설의 세상을 경험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이 비유는 모델에 불과합니다. 실제 그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 아바타 세상에서 쓰인 소설과 우리 자신의 아바타 삶 사이에 유사성이 많긴 하지만, 다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 각자의 이야기꾼들은 이 아바타 세상의 그 어떤 소설가보다 더 에워쌈에 능합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