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성을 띠는 아바타 세상.

상대성을 띠는 아바타 세상.

지금까지의 포스트들에도 불구하고, 혹은, 어쩌면 그 포스트들에 들어 있는 내용 때문에, 이야기꾼을 향해 분노가 치밀어오를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언급된 것들 중 이런 것들이 있습니다:

  • 이야기꾼은 아바타를 필요로 한다. 아바타가 든 이야기 없이는 이야기꾼이 이야기꾼일 수가 없다.
  • 우리에게 곤경이 닥치는 이유는, 우리가 누구/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이야기꾼이 누구/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서다.)
  • 사건은 딱 우리 시점에 든 그대로 펼쳐진다.

이것들을 종합하면, 엄청난 힘, 지복, 그리고 감사함이 밀려오는 느낌이 들 수 있습니다.

또한 이것들을 종합하면, 분노, 좌절, 억울함, 그리고, 한마디로, 이야기꾼이란 것의 멍청함을 향한 전반적인 분개가 치밀어오는 느낌이 들 수도 있습니다.

​둘 다 아주 괜찮은 방향입니다. 살면서, 우리는 두 방향 모두를 우리 삶의 특정 지점들에서 택하게 될 확률이 높습니다. 실은 우리가 두 방향 모두를 인지하고 있지 않으면, 그 어느 쪽 방향도 인지하지 못하게 됩니다.

왼쪽이라는 개념을 모른다면, 오른쪽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오른쪽이라는 개념을 모른다면, 왼쪽이라는 개념도 없습니다.

이처럼, 왼쪽과 오른쪽은 반대이면서도 하나입니다. 둘은 언제나 함께 존재합니다.

힘/지복/감사함 및 다른 연관 개념들은 분노/좌절/억울함 및 다른 연관 개념들과 반대입니다. 동시에, 이 개념 그룹들은 하나입니다.

좀 더 나은 무언가에 대한 자각 없이, 우리는 상황을 나쁘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좀 더 나쁜 무언가에 대한 자각 없이, 우리는 상황을 좋다고 인식하지 못합니다.

이를 진정으로 소화하면, 엿 같은 상황을 엿 같은 것으로 경험하면서도, 동시에 그것을 '나에겐 더 나은 뭔가가 있을 수 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증거로 삼을 수 있습니다.

다시 한번 강조하건대, 엿 같은 상황은 엿 같은 채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엿 같음 그 자체를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려고 하지 마십시오. 실제로, 만약 우리가 엿 같음을 바람직한 것으로 만들면, 그 시점 특화가 더 많은 엿 같음을 가져올 겁니다. 우리가 그걸 좋아하는 척할 수 있게요. 그 방향으로 시점을 계속 특화하다 보면, 우리는 뭐가 엿 같고 그렇지 않은지에 대해 아예 무감각해질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엿 같음은 엿 같음으로 두십시오! 하지만 동시에, 엿 같지 않은 것 역시 존재함을 우리가 사실로서 알지 않았더라면, 엿 같은 것을 엿 같다고 인식조차 하지 않았을 것임을 깨달으십시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