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몸 안의 '나.'

내 몸 안의 '나.'

그대가 ‘나’라고 여기는 것이 무엇이든, 그 ‘나’를 가져와 보십시오. 무엇이든 상관없습니다. 그대—교사이거나, 변호사이거나, 농부인 자일수도 있습니다. 그대—30세이거나, 60세이거나 90세인 자일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대—튼튼한 자, 통통한 자, 털털한 자일 수도 있습니다. 혹은 이 모든 것들의 조합일 수도 있습니다.

아무래도 상관없습니다.

그대가 어떤 ‘나’와 살든, 그것의 위치를 온종일 그대 몸의 가슴 부위에 유지하는 걸 시도해 보세요. 많은 문화권에서 ‘나’라는 단어를 말할 때면 가리키게 되는 바로 그 부위를 말합니다. ‘나’라고 말할 때 손이 자연스럽게 가슴에 안착하게 되는 그 위치입니다.

‘나’를 이 위치로 안내하는 목적은, 그곳이 우리가 ‘나’라고 말할 때면 자연스럽게 가리키게 되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나’가 머리로 올라가는 경우가 흔하기 때문입니다. 제 추측으로, 그 이유는 우리 중 20세기 후반과 21세기 초반의 일반적인 교육 체계를 거친 사람들이 ‘머리를 써라’와 같은 말을 들어와서입니다. 마치 거기가 신체의 다른 어떤 부위보다 더 나은 것처럼요. 우리는 머리를 얼마나 잘 쓰느냐에 따라 점수를 받아왔고, 어떤 때는 그러한 점수가 그 이후 우리 삶에 수십 년간 영향을 미쳤습니다. 논리/사고/이성 및 무엇이든 측정 가능하고 관찰 가능한 것은 여전히 어떤 집단들에서는 인간이 지닐 수 있는 가장 가치 있는 특성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우리가 불안하거나, 전전긍긍하거나, 전반적으로 위협받는다고 느낄 때면, ‘나’가 머리로 올라갑니다. 생존 메커니즘입니다.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머리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유리하다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이야기꾼의 눈으로 우리 자신을 바라볼 때조차 (그것이 무엇인지는 앞으로의 포스트들에서 다루겠습니다) 너무 진짜 많이 노력하면 에너지가 머리로 흘러가서 불필요하게 어지러워질 수도 있습니다. 심지어 숨 쉬는 게 어려워질 수도 있는데, 바라보기의 자연스러운 과정 때문이 아니라 ‘생각’을 하느라 과한 물리력이 사용되어서 그렇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머리를 쓰는 게 틀린 건 아닙니다. 머리란 나름대로 행복한 곳입니다. 하지만 ‘문제 해결’이 인간 성취의 최고봉으로 여겨지는 문화에서는 그것이 과하게 우선시되었을 것으로 예상합니다.

그러니 하루 중 마음이 멋대로 날뛰거나, 머리가 아프거나, 그대가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X, Y, Z라는 문제에 대한 A, B, C라는 해결책을 내놓는 것을 알아차리셨다면, ‘나’를 가슴 부위로 안내하세요.

신체를 실제로 움직이는 것이 도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손을 가슴 위로 가져가세요. 그리고 몸을 써서 ‘나’라는 단어를 입으로 내뱉어 보세요.

이것이 ‘나’입니다. 뛰고 있는 심장이 ‘나’입니다. 머리가 틀렸다는 건 아닙니다. 머리는 훌륭한 친구입니다. 하지만 머리가 너무 오래도록 너무 강력하게 우선시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니, 심장에게도 기회를 주는 겁니다.

이야기꾼의 눈을 사용할 때 얼마나 대단한 것들이 드러나든,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우리의 ‘나’가 얼마나 무한히 확장하든, 지금 이 특정 세계에 살고 있는 한, 몸이란 그 전체가 전부 훌륭한 친구입니다. 우리가 그것을 쓰고, 소중히 여기라고 몸이 있습니다.

그러니, 일단은, 이것이 ‘나’입니다.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