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대의 시점은 강력합니다.

그대의 시점은 강력합니다.

시점이 스스로 영감을 생성할 수 없다고 해서 한탄할 필요는 없습니다. 전혀요. 사실, 대부분의 경우 우리의 시점이 우리가 왜 무언가를 원하고 왜 무언가를 필요로 하는지 모른다는 점은 꽤 유용합니다. (참고로, 원하는 것과 필요로 하는 것은 근본적인 수준에서는 같습니다. 시점은 이를 모를지 몰라도, 이야기꾼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이 우리가 원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하며, 우리가 원하는 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과 정확히 일치함을 압니다. 이는 정렬됨의 문제입니다.) 

이야기꾼이 존재한다는 것은 우리 삶의 대부분의 결정들을 해주며 우리를 에워싸는 무언가가 있음을 의미합니다:

  • 이야기꾼은 우리의 상처를 치유해주는 힘입니다. 우리가 각각의 세포를 의식적으로 한 땀 한 땀 봉합할 필요 없이요.
  • 그것은 우리가 잘 때 우리 심장을 뛰게 하는 힘입니다.
  • 그것은 우리의 꿈을 빚는 힘입니다. 그리고 동일한 방식으로, ‘현실’이라고 부르는 그것을 빚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에게는 할 이야기가 필요합니다.

이야기는 어떻게 하나요? 캐릭터를 통해서 합니다. 이 경우에는 그 캐릭터가 아바타인 것이고요. 그러니 근본적으로, 이야기꾼, 시점, 그리고 아바타는 서로로부터 절단될 수 없습니다. (“'상상'과 '진짜'의 구분에 대하여.”도 참고해 주십시오. 손목/팔뚝/팔꿈치가 유용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그것들이 기능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이 서로로부터 잘려 나갈 수는 없음을 언급했었습니다. 우리는 아마 손목/팔뚝/팔꿈치 따로따로가 아니라 팔 전체를 원하겠죠.)


소설을 상상해 보십시오. 그 안에서 캐릭터는 여러 일을 하며 이리저리 뛰어다닙니다. 캐릭터에게는 시점이 있습니다. 그 시점은 어디서 옵니까? 소설의 이야기꾼으로부터 오는데…

…자신이 어디서 왔는지를 진정으로 알지 못하는 캐릭터에게는 (진정한 기원을 말합니다. 이야기 속의 부모나 문화와 같은 생물학적인 기원이 아니라요.) 시점이 다른 곳에서 온 것처럼 보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알죠. 우리, 소설 바깥의 사람들요. 우리는 누군가가 그 이야기를 썼다는 걸 압니다. 바로 이야기꾼입니다. 이야기꾼은 이야기 속의 전부입니다: 캐릭터, 플롯, 배경… 전부요. 동시에, 캐릭터는 이야기꾼입니다. 그리고 전자가 후자의 힘을 끌어다 쓸 때, 전자 또한 플롯이자 배경이자… 역시나 전부일 수 있습니다.


다음의 아이디어로 돌아가 봅시다: 이야기꾼에게는 할 이야기가 필요하다.

이야기꾼은 시점, 아바타, 그리고 이야기의 다른 요소들보다 더 ‘낫다’고 볼 수 없습니다. 실은, 이야기꾼은 그 모든 요소들을 필요로 하고 원합니다. 심지어 아바타(캐릭터 같은)에게 의존하는 것은 이야기꾼(소설가 같은) 쪽이라고 주장할 수 있기도 합니다. 그 반대가 아니라요.

저 아이디어를 고려해 보고 진정으로 경험해 봅시다. 소설이 쓰이지 않으면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를 진정으로 고려해 보세요.

캐릭터의 경우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소설이 있었던 적이 없기에, 캐릭터는 있었던 적이 없습니다. 캐릭터는 자기가 존재한 적이 없었다고 해서 한탄하지 않을 겁니다. 왜냐하면 정말로 존재했던 적이 없으니까요! 소설 캐릭터에게 존재하지 않음이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한편, 소설가의 경우에는: 만약 그녀가 소설을 통해 뭐라도 경험하고 싶다면, 마땅히 소설을 써야 할 겁니다.


아바타 세상은 이야기꾼에게 제한도 주고, 자유도 줍니다. 제한 덕분에 특정한 것들이 경험될 수 있는데, 이는 자유를 줍니다. 아바타는 이야기꾼이 그 제한적이고 자유로운 아바타 세상을 경험하도록 해주는 채널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전혀 무력하게 느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아바타이며, 동시에 이야기꾼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의 얼마나 많은 부분이 우리를 위해 저절로 펼쳐지는지 고려해보십시오. 이야기꾼은 우리를 사랑하고 어여뻐 합니다.

사실, 대부분의 아바타들이 자기들의 이야기꾼들을 사랑하는 것보다, 대부분의 이야기꾼들이 자기들의 아바타를 사랑하는 것 같습니다. 아바타와 그것의 시점은 이야기꾼이 보내는 영감을 거부할 수 있다는 점을 상기하십시오. 아바타는 너무나 자유롭게도 그리할 수 있는 나머지, 이야기꾼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간주할 수 있습니다. 마치 소설가의 존재를 부정하는 소설 캐릭터 같습니다. 캐릭터가 의식적으로 소설가를 받아들이지 않아도 소설은 잘만 굴러갑니다. 의도적으로 메타적이지 않은 대부분의 소설이 이런 식으로 굴러가죠.

우리가 이 아바타 세상에서 무엇이 우리를 모는 힘인지 (우리의 시점에게 영감을 보내는지) 숙고하지 않을 때, 우리는 그러한 소설 속 캐릭터 같습니다.

우리가 이 아바타 세상에서 우리의 정체를 알기 시작할 때 (우리가 이야기꾼의 일부라는 것; 우리가 바로 이야기꾼이라는 것), 우리는 메타 소설 속 캐릭터 같아지기 시작합니다. 소설에 대한 소설 말입니다. 우리는 스스로의 이야기를 쓰는 캐릭터가 되기 시작합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