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대되고 상대되는 것들의 사용에 대한 추가 내용 + 유용한 시점 특화.

반대되고 상대되는 것들의 사용에 대한 추가 내용 + 유용한 시점 특화.

지금까지 이 세계관의 다양한 측면을 다뤘습니다. 몇 가지 핵심을 요약하고 더 상세히 설명하자면:

  • 아바타에게는 무언가가 부정적일 수 있으며, 그러한 무언가에는 부정성이 허락되어야 한다.
  • 동시에, 이야기꾼은 아바타의 모든 것을 필연적이며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받아들인다.
  • 또한 아바타 수준에서조차, 부정성이 없었더라면 아바타는 긍정성을 어떻게 경험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아바타가 부정적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은 부정적이게 둬야 한다. (내가 싫어하는 걸 '긍정적'으로 만들려고 하지 말 것.) 한편, 동시에, 아바타는 부정성의 존재로 인해 필연적으로 긍정성이 존재할 수밖에 없음을 깨달을 수 있다. 모든 경험은 하나의 동전에 딸린 양면이다.

부정적인 반응은 우리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시점 특화 부분들을 우리에게 일러주는 신호입니다.

이런 겁니다:

끓는 물이 가득한 냄비가 있다고 해봅시다. 끓는 물에 손을 넣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을 감지하지 못한다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요? 그러면 손을 끓는 물에 넣고는, 잘 익을 때까지 끓게 둘지도 모릅니다.

부정적인 반응을 감지할 수 있어야지만 손을 끓는 물에서 뺄 수 있을 겁니다.

이것이 '부정적인 건 부정적이게 둬야 한다'의 의미입니다. 우리는 고통을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고통을 '좋다'고, '바람직하다'고 만드는 것은 스스로를 산 채로 요리하는 상황에 우리를 몰아넣을 수 있습니다. 신호에 너무 무감각해져서요. 고통을 느끼는 능력 자체가 바로 우리가 고통 없는 상태를 자각하고 있다는 증거입니다. 따라서 고통을 느끼는 와중에 우리는 고통 없는 상태의 필연적인 존재를 알아볼 수 있습니다.

다음도 유의하시길 바랍니다: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인 것으로 바꾸려고 함으로써, 우리는 사실은 긍정적인 것을 경험하지 못하게 됩니다. 끓는 물의 고통을 '좋다'고 여긴다면, 그 고통을 바람직한 무언가로 바꾼 것이 되고, 그러면 대안에 대한 상상은 시작조차 못 하게 됩니다.


부정적인 반응은 우리의 시점이 우리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여기는 방식으로 특화되어 있음을 알려줍니다. 끓는 물의 예시에서는 신체적 고통에 추가로, 다음과 같은 즐겁지 않은 감정 반응이 올라올 수 있습니다:

  • 자기 탓: 손을 끓는 물에 넣다니, 머저리 같군.
  • 자기 불쌍함: 불쌍한 나. 또다시 괴로움에 쩔어 있는 상황에 놓였네.
  • 외부 탓: 세상은 엿 같다. 끓는 물을 담은 냄비가 여기저기 널렸어.
  • 외부 불쌍함: 끓는 물이 가득한 세상에 사는 내 인간 동지들 생각에 슬픔이 넘쳐 흐른다.
  • 화: 빌어먹을 끓는 물! 망해라!
  • 수치: 너무 창피하다. 내가 끓는 물에 손을 넣었다는 걸 누가 알아내면 어떡하지?
  • 기타 등등.

그리고 위와는 약간 다른:

  • 무감각.

무감각은 어쩌면 가장 위험한 시점 특화일지도 모릅니다. 그런데도 '이야기꾼의 눈'을 적용하기 시작할 때, 우리 중 대부분은 아마 어느 정도의 무감각은 지닌 상태에서 시작할 겁니다. 그래도 괜찮습니다. 아바타로서의 우리에게는 엿 같습니다만, 상대적인 측면에서 엿 같은 거지, 절대적인 측면에서는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무감각하기 때문에, 깨어난 상태도 존재할 수 있습니다.

이는 매우 중요합니다. 반대되는 것이 순전히 반대되기만 하는 세계관에서는, 한 상태에 있는 것이 곧 다른 상태를 불가능하게 만듭니다.

이야기꾼의 눈은 그런 세계관이 아닙니다. 이 세계관은 이렇게 말합니다. 왼쪽으로 갔기 때문에 오른쪽으로 갈 수 있다고. 북쪽으로 갔기 때문에 남쪽으로 갈 수 있다고. 그 어떤 반대되며 상대되는 용어를 넣어도 됩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부유할 수 있습니다. 못생겼기 때문에 잘생길 수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알아볼 수 있는 능력 자체가 시점 특화의 하나입니다. 반대되는 것들은 서로의 존재를 증명합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