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당초, 뭣 하러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건가?

애당초, 뭣 하러 이야기 속에 존재하는 건가?

왜 그냥 우리 모두가 이야기 속에서 깨어나서는, 이야기꾼의 성질로 돌아가고, 이에 따라, 말하자면,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가? 왜 이야기꾼은 아바타를 이야기 내의 어려움 속으로 보낼 필요가 있는가?

다른 말로 하자면, 이야기가 이러면 왜 안 되나?:

옛날 옛적에, 날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날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날았습니다.

끝.

왜? 아니 왜?

왜냐하면...

위의 이야기를 다시 한번 읽어 보십시오. 개인적으로는, 저라면 저것을 이야기라고 부르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뭐, 어쩌면 우리 중 어떤 이들은 '이야기'를 다르게 정의할 테니, 저것이 이야기라고 친 상태에서 저것이 무엇을 해내는지 살펴봅시다.

저것이 무엇을 해냅니까?

​아무것도 안 해냅니다!

재미도 없고... 의미도 없고... 아무것도 없습니다. ChatGPT(2024년형)은 이런 이야기라면 수백만 개라도 쓸 수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완벽하게 논리적입니다. 완전히 말이 됩니다. 와, 어떤 여자애가 날고 싶어 하더니 날았대! 끝! 얼마나 합리적인가! 그리고 아무것도 안 해냅니다. 전혀 아무것도. 감히 말하건대, 우리 중에 우리 존재를 위의 이야기처럼 생긴 이야기에 낭비하고 싶어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끔 우리는 저런 종류의 이야기를 살고 싶다고 말하거나, 그런 것처럼 행동합니다. 우리는 아바타 세상에서 '돈을 원해'로부터 '돈이 있다'로 점프하길 원한다고 주장합니다.

왜일까요? 주된 이유는, 제 생각에, 우리가 이야기꾼보다는 아바타와 더 동일시된 경향이 있어서인 것 같습니다.

아바타의 입장에서, 자원은 한정되어 있습니다. 무한한 텅 빈 페이지는 돌에 새기듯 고정되었습니다. 아바타에게, 현실이란 매우 단단해 보입니다. 뭔가가 빨랑 벌어지지 않으면, 아바타는 생존할 수 없다고, 생존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아니면, 뭐가 됐든지 다른 방식으로 고통에서 허우적댈 거라고 여깁니다.

한편, 이야기꾼의 입장에서는 그녀가 뭐든 쓸 수 있다는 것이--정말이지 뭐가 됐든지 간에 쓸 수 있다는 것이--너무나 자명합니다.

하지만, 기억해 주십시오: 이야기꾼이 곧 아바타고 아바타가 곧 이야기꾼입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아바타를 고문으로 가득한 삶에 던져 버리는 웬 잔인한 힘이 아닙니다. 전혀 아니올시다. 아바타가 이야기꾼을 필요로 하는 만큼, 이야기꾼은 아바타를 필요로 합니다. 그리고 어쩌면 더 중요하게, 아바타는 이야기꾼을 원하거나 원치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야기꾼은 어떻습니까? 이야기꾼이 아바타를 원하지도 않으면서 아바타를 만든다면, 그런 이야기꾼은 정말 매우 강력하게 심히 멍청하다고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치가 않을 겁니다.

주변을 둘러보십시오.

그대가 특정 시공간에서 얼마나 엿 같은 상황에 있든지 간에, 이 온 우주의 그 어떤 존재도 극도의 깊은 관심--무조건적인 사랑--을 품지 않고서야 그 상황을 만들어내는 수고를 들이지 않았을 겁니다. ('무조건적인 사랑'이 무슨 뜻인지에 대해서는 차후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 그대의 상황을 만든 것 혹은 만든 자가 무엇/누구든, 그것/그자는 그대를 위해서 그리 행했습니다. 그대가 그대의 상황을 엿 같이 여긴다 한들, 그대 주변은 128p인 와중에, 소위 운 좋은 상황에 놓인 사람들의 환경은 4k 해상도인 것은 아니잖아요. 네, 이야기의 내용과 그 내용에 대한 그대의 해석과 상관없이, 말하자면 그대의 '배경 세트'라고 할 수 있는 그것이 다른 어느 사람의 것과 비교해도 흠잡을 데 없이 완벽하다는 건 부정할 수 없을 겁니다.


전쟁 영화를 고려해 보십시오. 아니면 디스토피아 게임. 혹은 누아르 만화책을요.

그러한 이야기 속에서 캐릭터들은 세상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대개는 삭막하며 공포스러운 곳으로 보죠. 그리고 이것은 캐릭터 입장에서 보면 완벽하게 사실입니다.

​한편, 그러한 이야기 세계들의 창작자들은 그곳들을 어떻게 바라봅니까? 세상에나, 그 창작자들은 자기들의 세상을 물론 당연히 사랑합니다! 그러한 창작자들과 같은 차원에 사는 어떤 사람들이 그러한 이야기들을 경멸한다 한들, 무슨 상관입니까? 창작자들이 그것들을 사랑하는데. 그리고 그러한 이야기의 팬들도 있죠. 어떤 팬들은 그런 이야기들을 너무나 좋아해서, 그 캐릭터들을 코스프레하고 그 세상에 살고 싶어 합니다. 캐릭터들이 곤경에 처하는 세상임을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바로 그 세상인데도요.

왜일까요?

​경험이야말로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설정은 여전히 엿 같은 이야기를 떠올려봅시다. (전쟁, 디스토피아, 누아르... 혹은 어쩌면, 지금 당장 그대가 있는 환경.)

그 캐릭터/아바타가 갑자기 자기 시점에다가 이렇게 선언하면 어떨까요? "나는 네가--창작자/이야기꾼이--나를 통해 이 세계를 경험하고 있다는 걸 완전하게 알고 있다. 나는 내가 너고, 네가 나라는 걸 안다.

이전 포스트에서 말했듯이, 이러면 이야기꾼이 아바타에게 곤경을 펼치기가 불가능해지며, 불필요해집니다. 곤경이 안 펼쳐질 거란 말을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윙크 윙크, 내가 이야기꾼인 걸 아는 척해보자"면서 도전을 피하려고 할 순 없습니다. 우리가 바로 (우리 개개인의, 각자의) 이야기꾼이라는 것을 우리가 정말로 깊게 절대적으로 안다면, 우리는 그 무엇도 피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고통 속에서 질척댄다는 건 아닙니다. 고문받는 것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도 아닙니다. 세상이 우리를 벌주기 위해 우리한테 던져진 무언가가 아님을 안다는 뜻입니다. 세상은 선물로서 우리를 위해 펼쳐졌던 겁니다.

엿 같은 그 상황--전쟁/디스토피아/누아르 등등--이 바로 영웅이 탄생하는 곳입니다.

다시 말하건대, 이전 포스트에서 언급됐듯이, 이런 상황이 아바타에게는 정말이지 엿 같다는 걸 인정해주는 것이 중요합니다. 아바타가 느끼는 걸 무르라고 해선 안 됩니다. 사실, 그건 '이야기꾼의 눈'에서 우리가 하는 것과 반대됩니다. 아바타의 느낌을 무르는 것은, 이야기를 쓰는 목적 자체를 무효화합니다.

왜냐하면, 다시 말하건대, 이야기는 뭣 하러 존재합니까?

경험을 위하여.

이야기꾼은 이렇게 쓸 수도 있었을 겁니다.

옛날 옛적에, 날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날 수 있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날았습니다.

끝.

그런데 안 그랬네요.

왜일까?

그녀 자신을 경험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아바타 역시 자신을 경험합니다. 그녀가 곧 아바타고, 아바타가 그녀입니다.

참고로, 날기에 대한 영감을 거부한 경우에도 마찬가지가 적용됩니다:

옛날 옛적에, 날고 싶어 하는 여자아이가 살았습니다.

그녀는 자기가 날 수 없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녀는 날지 않았습니다.

끝.

이 여자애가 영감을 거부한들, 날지 않는 길에 놓인 경험은 많습니다. 그리고 이야기꾼은 여자애를 위해 그 이야기를 펼쳐줄 겁니다.

한편, 아바타의 상황이 최대치로 엿 같다고 해도, 우리는 동시에 그 상황을 이야기꾼의 입장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상상력은 그 정도로 대단합니다. 그리고 시점은 아바타의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또한, 해당 아바타를 통해 이야기꾼에게 전해지는 유일한 현실이기 때문에--시점에 들어가는 그것이 무엇이든, 그게 진실입니다. 우리가 이야기꾼이라고 하면 우리는 이야기꾼인 겁니다.


이건 외부 증거가 제공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정의상 아예 불가합니다. 누군가의 시점은 그 누군가의 현실입니다. 누군가가 받아들이는 바로 그것이 그 누군가의 현실이며, 누군가가 거부하는 그것은 누군가의 현실이 아닙니다. 다른 누구도 그대에게 와서 '현실은 이렇다 저렇다'고 말해줄 수 없습니다. 진정으로 그런 것을 전달할 순 없단 겁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전해 들은 그 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 역시 그대에게 달려 있으니까요.

이걸 눈치챈 적 있으십니까?

그대만이 그대 시점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여기 있습니다. ('무엇'이 '누구'보다 우리의 정체에 더 적합한 묘사입니다. 적어도, 한국어에서는 그렇습니다. '누구'란 인간이거나 인간 비스무리한 존재를 암시하는데, '무엇'은 무엇이든 될 수 있으니까요. 그리고 우리는 정말이지 무엇이든입니다. 이야기꾼으로서는요.)

​우리는 우리가 무엇인지를 알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아바타의 특화된 시점으로서 그렇고...

...하지만 또한, 그 특화를 통해서, 직/간접적으로 특화되지 않음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그대가 특화 혹은 탈특화를 각각 얼마나 강조할지는 그대에게 달려 있습니다. 둘은 함께 작용하는데, 그대가 균형을 택하면 됩니다. 그대가 원하는 비율 말입니다. 이 세계관은 양극단을 서포트할 수 있습니다. 단, 극단에 있다고 하더라도, 아바타와 이야기꾼 둘 다 존재한다는 게 핵심입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이 세계관은 아바타가 완전히 사라지거나 이야기꾼이 완전히 사라지는 세계관이 아닙니다.

아무튼, 도전이란 그저 우리가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도구입니다. 도전은 우리가 승낙하거나 거부할 수많은 영감이 떠오르는 기회입니다.

우리가 점점 더 이야기꾼과 동일시함에 따라 (제 가정에 따르면, 우리 대부분은 아바타와 더 동일시한 상태에서 시작하기에, 이야기꾼과 더 동일시할 필요성이 있습니다), 우리는 도전을 도전으로 바라볼 수 있습니다: 꿈의 일부인 무언가로요.

이것은 꿈입니다.

이 삶은 꿈과 다를 게 없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