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에 나타난 문제들의 목록을 작성하세요.

시점에 나타난 문제들의 목록을 작성하세요.

원치 않는 시점 특화를 용해하는 과정은 묘사하기에 간단합니다:

  1. 이야기꾼에게 문제를 가져간다.
  2. 이야기꾼이 그대와 함께 그 문제를 바라본다.
  3. 문제가 녹아나간다. 왜냐하면 그녀가 바로 그대라는 것을 깨닫게 되니까. 이야기꾼은 그대다.그대는 그저 잠시 아바타와 좀 더 진하게 동일시되었던 것뿐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기는 그리 쉽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우선, 스스로에게 정직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우리 시점에 무엇이 등장하든, 그대로 읽어야 합니다. 마치 소설을 건너뛰는 부분 없이 읽듯이요.

시점을 고칠 필요가 없다는 점을 아는 것이 도움이 될지도 모릅니다.

시점은 있는 그대로 완벽합니다. 그것이 ‘부정적인’ 것을 말하더라도 상관없습니다. 만약 시점이 부정적인 것을 말해주지 않는다면, 그대 안에 부정적인 것이 있다는 걸 꿈에도 모를 겁니다. (끓는 물의 예시를 상기하십시오. 끓는 물에 닿았을 때 고통에 비명을 지르지 않는다면, 죽는 순간까지 그대가 요리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겁니다. 그리고 거기서 이야기가 끝나겠죠.)


시점이 특정 영감에 얼마나 진하게 특화되어 있느냐에 따라, 어떤 눈작업 세션은 몇 초가 채 안 걸리고, 다른 세션은 수개월에서 수년이 걸립니다.

저는 두 경우를 모두 겪었습니다. 눈작업이 ‘매우 오랜 시간’ 걸리는 경우에는 그 이유가 다양하다는 점을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예를 들자면: 1) 시점에 무엇이 들었는지 진정으로 마주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2) 원래의 환경보다 그릇이 커져서, 빈 페이지 및 원하는 시점 특화를 더욱 깊게 경험하도록 해줄 다양하며 추가적인 영감들을 이야기꾼이 보내고 있기 때문에.

핵심은, 과정을 그대 몸으로 느껴야 한다는 점입니다. 이는 수영하는 법이나 자전거 타는 법을 배우는 것과 같습니다.


이야기꾼에게 그 어떤 문제나 행복한 경험을 가져가도 좋습니다. 하지만, 앞선 포스트들에서 설명했듯이, 문제로부터 탈특화하는 것이 행복으로 특화하는 것보다 쉽습니다. 또한, 말했듯이, 단지 문제로부터 탈특화하는 것만으로도 행복은 저절로 체험됩니다. 이는 행복(지복)이 우리의 디폴트 상태이기 때문입니다. 삶은 괴로움이 아닙니다. 지복이 삶입니다. 불필요한 시점 특화들을 없애고 나면, 삶의 본질이 자유로이 드러납니다. 우리가 거기에 더 얹어서 해야 할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지만 나중에 특화에 대해서도 얘기를 하긴 할 겁니다. 왜냐하면 특화는 취향이기도 하거든요. 모든 사람들이 호텔 예약이나 항공권을 미리 준비해두지 않고 여행을 떠나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목적지의 유명한 관광지를 조사하기를 좋아합니다. 목적지가 있는 것 자체가 취향입니다. 특정한 것을 원하는 데에는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하지만 다시 말하건대, 탈특화가 더 쉽습니다. 게다가 이를 통해 나중에 특화가 더 쉬워집니다.


일단 제 목표는, 원치 않는 시점 특화가 용해되는 최초의 경험으로 그대를 데려가는 겁니다. 그걸 경험하고 나면, 저나 다른 누구의 설득 없이도, 아바타 세상에서 뭘 하기 전에 그대의 모든 희망, 염원, 꿈, 괴로움, 그리고 도전 과제를 이야기꾼에게 가져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걸 충분히 되풀이하다 보면, 처음부터 전부 그대였다는 걸 깨닫는 데에도 설득이 필요 없어질 겁니다. 그대가 이야기꾼이었고, 그대가 아바타였고, 그대가 전부였다는 거죠. 너무나 이러한 나머지, ‘현실’이 바뀔 필요도 느끼지 못할 겁니다. 그런데도 ‘현실’은 분명히 바뀔 겁니다. 왜냐하면 시점이 현실이니까요.

자.

이제 그대의 시점이 선보이는 문제들에 주의를 기울이십시오. 일, 사랑, 건강, 돈, 뭐에 대한 거든 상관없습니다. 아마 그대 속을 썩이거나 심지어 분노하게 하는 요소가 다양할 겁니다.

그대가 문제라고 여기는 그 모든 삶의 요소들 중, 다음과 같은 것을 고르십시오.

  • 당장 생명을 위협하진 않는 것
  • 그럼에도 꽤 중대한 것. 따라서, 만약 그 문제가 사라진다면, 그대가 쉽게 안도감을 느낄 만한 것.

그 문제에 대한 그대의 반응을 관찰하십시오.

예시

그대가 고른 문제가 이거라고 해봅시다: 상사가 날 격하게 싫어한다.

이 문제와 관련해, 그대의 시점에 다음과 같은 반응들이 나타날지도 모릅니다:

  • 상사는 다른 동료들만 좋아한다.
  • 인생은 불공평하다.
  • 나는 열심히 일해야 한다.
  • 왜 열심히 일해야 하지? 엿 같네.
  • 닥치고 일이나 하는 게 맞는데.
  • 상사는 머저리다.
  • 동료들은 머저리다.
  • 그냥 은퇴해서 아무것도 안 하고 싶다.
  • 부자들은 엿 같다.

기타 등등.

이것들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이 반응들을 이야기꾼에게 가져갑니다. 그녀에게 전부 말합니다.

꼭 기억해야 할 점은 이겁니다: 그녀는 우리를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라본다는 점.

무조건적인 사랑의 이 시선 없이는, 이런 종류의 시점 검토가 해로울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시점은 우리가 특화된 것을 계속해서 보여줍니다. 엿 같은 것에 집중할수록 엿 같은 일이 일어납니다. 이 사실 때문에 어떤 세계관들은 ‘항상 긍정적이어야 한다’거나 ‘싫어하는 건 무시해라’ 같은 결론에 도달합니다.

하지만 이야기꾼의 눈은 이렇게 말합니다. 1) 그건 불가능하다. 그리고 2) 그건 불필요하다.

불가능한 이유는, 앞선 포스트들에서 다뤘던 상대성의 성질 때문입니다.

그리고 불필요한 이유는, 우리에게 이야기꾼의 눈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눈은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바라봅니다. 그 포괄적인 시점 특화가 이 세계관에서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의 토대입니다. 이 때문에, 우리가 눈을 쓰는 한 우리는 아바타로서 ‘엿 같은 것에 집중’할 수 있되, 동시에 이야기꾼 수준에서는 우리의 이야기가 절대적으로 완벽하다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딱 있을 필요가 있는 그곳에 있습니다. 딱 우리가 원하는 그곳에 있습니다. 그렇다고 거기에 (아바타의 엿 같은 상황에) 남아 있어야 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지금 당장, 특정 순간에, 이야기는 완벽합니다.

따라서, 그대의 시점에 담긴 내용을 살펴볼 때, 그대가 아바타와 이야기꾼 둘 다임을 늘 기억하십시오.

다음 포스트에서 시선에 대해 더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