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점 수준의 자유 의지 문제.

시점 수준의 자유 의지 문제.

우리는 곧 우리가 상상하는 것(우리의 시점이 집중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분명 아바타 세상에서는 각각의 개체 사이에 구분이 존재합니다. 시점 자체는 어디로든 언제로든 가서 모든 것을 동등한 무게/견고함/타당성으로 바라볼 수 있으나, 시점은 어떤 요소들은 특정 아바타들과 더 긴밀하게 연관 짓기에, 각 아바타는 아바타 세상에서 각각 다른 개체인 것처럼 보이게 됩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시점은 할머니의 귀걸이를 보고 그 안의 할머니를 ‘압니다.’ 이 시점을 이용함으로써 우리는 할머니가 될 수 있고, 할머니와 시간을 보내던 과거의 우리가 될 수 있으며, 그밖에도 온갖 것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가 곧 귀걸이인 것은 아닙니다. 할머니는 또한 귀걸이를 보고 있거나 할머니를 떠올리고 있는 나의 아바타와 동일하지도 않습니다.

무엇이 이 구분을 만들어 낼까요?

두 가지입니다.

  1. 시점의 영감이 오는 원천.
  2. 그러한 영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시점의 결정. 때로 이 결정은 자동적으로 (무의식적으로) 일어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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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감: 시점이 무언가를 향해 초점을 돌리도록 하는 그것

“현재”란 어차피 매 순간 움직이고 있다는 점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시간과 공간은 서로 엮여 있기에, 공간 역시 매 순간 움직입니다. 그러한 모든 시공간을 하나로 엮는 유일한 기준은 그러하게 만드는 무언가입니다. 우리 개개인의 ‘나’가 그러하게 만듭니다. ‘나’를 구성하지만 시점은 아닌 무언가가 시점으로 하여금 ‘그러한 모든 시공간을 하나로 엮는 유일한 기준은 그러하게 만드는 무언가입니다’라는 문장을 읽는 ‘나’가 지금 이 문장을 읽는 ‘나’와 동일하다고 믿게끔 영감을 줍니다. 그리고 이 경우, 시점은 그 영감을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1초 전의 우리’와 ‘지금 이 순간의 우리’를 ‘같다’고 여기는 이유는 그것이 옳거나 맞아서가 아닙니다. 당연히 주어진 게 아닙니다. 실질적인 삶의 경험에 기반해 고려해 보십시오. 우리는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극적으로 변화한 사람들을 압니다. 어느 정도냐 하면, ‘더는 예전 그 사람과 동일 인물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말이죠. ‘나’를 구성하는 수많은 점들은 반드시 이어져야만 하는 게 아닙니다.

우리에게 두 가지 다른 버전이 있을 때, 그것들이 연결되고 우리가 그것들을 둘 다 ‘나’라고 여기는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하라는 영감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영감의 원천을 ‘이야기꾼’이라고 부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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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꾼: 영감의 원천; 시점 너머의 모든 것을 보살피는 힘; 시점과 그 안에 든 모든 것을 포함하는 힘

이야기꾼과 같은 무언가의 존재는 불가피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시점에게 (완전한) 자유 의지가 없다는 걸 경험으로 아니까요. 

그대가 초코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면, 그건 초코아이스크림을 먹고 싶기로 결정해서 그러합니까? 아닙니다. 그대는 초코아이스크림을 원하라는 영감을 받았습니다. 시점 수준에서 할 수 있는 건 그 영감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하는 것입니다.

나는 초코아이스크림을 좋아하며, 그것이 할머니가 가장 좋아하던 맛이라서 먹고 싶은 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할머니는 그 맛을 왜 좋아했을까요? 초코맛 아이스크림은 언제 발명됐습니까? 그걸 발명한 발명가는 그것을 발명하고 싶기로 결정했나요? 아닙니다. 그것을 발명하라는 영감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은 그 특정한 경우에는 그 영감을 받아들였습니다. 어쩌면 다른 수많은 사람들도 같은 영감을 받았지만, 거부했는지도 모릅니다. 따라서 그들은 초코아이스크림이라는 아름다운 것의 발명가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건 초코아이스크림과 관련된 것들보다 더 중요하고 더 논리적으로 보이는 듯한 것들에도 적용됩니다. 이 우주에는 수십억 개의 영감들이 떠다니고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받아들이고 어떤 사람들은 거부합니다. 또한, 동일한 ‘나’가 한 시공간 좌표에서는 어느 영감을 거부하지만 다른 시공간 좌표에서는 바로 그 같은 영감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그 영감은 ‘오늘은 파란 셔츠를 입고 싶은 기분이 드네’라든지 ‘직장을 관둘 때가 됐어’라든지 ‘내 앞에 있는 이 사람과 결혼하고 싶어’일 수 있습니다.

비슷하게:

그대가 잠에 들고 싶을 때, 그대는 잠에 들고 싶기로 결정해서 잠에 들고 싶습니까?

아닙니다. 무언가가 그대에게 ‘잠에 들 때가 됐어’라고 영감을 주었습니다. 그 무언가는 무엇입니까? 그대의 습관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겁니다. 그대는 늘 밤 10시에 잠을 자니까, 10시가 되면 잠에 들어야 한다는 걸 안다고요. 하지만 그대는 애초에 왜 늘 10시에 잠을 잤습니까? 그것이 잠을 자기에 옳은 시간이라서요? 왜요? 다른 어떤 시공간에서는 사람들이 자정에 잠드는 게 정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쩌면 그대 본인이 10시가 아닌 12시에 자던 때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가 그대의 정상을 만들었습니까? 누가 이 모든 걸 시작했습니까? 분명 그대의 의식적인 시점은 아닙니다. 이는 이러한 질문들을 충분히 여러 번 반복하다 보면 드러납니다.

그리고 그대가 사랑에 빠질 때, 그대는 그렇게 하기로 결정해서 그러했습니까?

그랬지 않기를 바랍니다…! 정말이지, 영감이 그대를 번갯불처럼 쳤기를 바라요.

또한, 최초의 영감 다음에는 2차 영감들이 찾아옵니다. 예를 들자면, ‘논리적’인 듯해 보이는 일 관련 결정이 그렇습니다. 그대의 결정이 옳은 결정이라는 것을 무엇이 말해줍니까? 그 산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의 평균 수입에 대한 통계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러한 통계가 그대에게 적용되리라는, 혹은 그대가 대단한 행운이나 대단한 불운의 아웃라이어는 아닐 거라는, 혹은 이 일이 아니라 통계적으로 같은 양의 돈을 버는 다른 일을 선택할 수는 없다는 생각은 왜 하십니까?

어딘가의 누군가는 신탁을 찾아가서 일 관련 결정을 할 겁니다. 이러한 이는 신탁에 조언을 구하라는 영감을 받은 겁니다. 그것이 덜 ‘논리적’입니까? 왜요? 신성하다고 믿는 힘에 의존하는 것이 그대 본인도 아닌 수백만 명의 사람들의 평균에 의존하는 것보다 더 불안정한 토대를 기반으로 해서요?


우리는 우리가 결정을 하기로 결정했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또한, 결정을 하기로 결정한 다음에는, 무엇을 고려하고 무엇을 고려하지 않을지 결정한다고 여길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러지 않습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우리에게 주어진 영감에 ‘네’ 아니면 ‘아니오’라고 답하는 것뿐입니다.

이야기꾼은 우리에게 영감을 보내고, 시점은 그것을 인지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시점은 그것을 받아들이거나 거부합니다. 이러한 시점이 영감을 스스로 생성하지 않는다고 해서 슬퍼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점에는 대단한 힘이 있습니다. 이 점을 앞으로의 여러 포스트에서 다루겠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