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꾼과도, 아바타와도 동일시하기 + 내면과 외면.

이야기꾼과도, 아바타와도 동일시하기 + 내면과 외면.

그 어떤 이야기라도 쓸 수 있는 것은 이야기꾼입니다. 우리가 이야기꾼과 동일시하면 할수록, 우리는 그 힘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그렇긴 하지만, 다시 한번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대의 시점은 강력합니다."에서 언급했듯이, 이야기꾼은 아바타를 필요로 합니다. 아바타 없는 이야기꾼에게는 빈 페이지만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 빈 페이지는 순수한 가능성입니다: 존재할 수 있는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음으로써 빈 페이지에 "존재"합니다.

하지만 가진 거라고는 빈 페이지뿐이고, 이야기가 없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이야기꾼의 눈'은 이야기꾼이기도, 아바타이기도 하고 싶은 이들에게 적합한 세계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오로지 아바타와 동일시한 상태로 시작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만약 그대가 둘 다와 동일시하고 있다면, 아마 이 웹사이트에 있는 내용을 읽을 필요가 없을 겁니다.) 그렇다면, 이야기꾼과는 어떻게 더 동일시를 하는가?

​우리가 이야기꾼이기도 하다는 영감을 받아들이면 됩니다. 그게 다입니다.

이것이 "너무" 간단하게 들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야기에서는 모든 것이 그렇게 작동합니다.

예를 들어, 소설가가 소설에 이런 걸 쓴다고 해봅시다:

한아임은 허리까지 오는 길고 검은 머리를 지녔다.

그러면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한아임은 딱 그대로 허리까지 오는 길고 검은 머리를 지니게 됩니다.

아바타 세상이 작동하는 원리도 다르지 않습니다. 간단합니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해서 꼭 쉬운 건 아닙니다. 꼭 어려운 건 아니지만, 꼭 쉬운 것도 아니에요.

대개, 우리가 뭔가를 생각한다고 생각할 때, 우리는 사실 그것을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우리의 이야기라고 생각하는 것이 무엇이든 간에, 바로 그것이 곧 우리의 이야기다'라는 아이디어를 접하게 되면, 우리 중 대부분은 이런 반응을 보일 겁니다: 하지만 그러면 나는 왜 백만장자가 아닌가요? 하지만 그러면 내게는 왜 완전 핫한 몸이 없는 건가요? 하지만 그러면 나는 왜 '은하계 군대에 맞서는 국제 연합 지구 연맹'의 총장이 아닌가요?

이에 대한 대답도 간단합니다: '하지만'들 때문입니다. 우리가 욕망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닌, '하지만'들이 시점을 점령하고 있어서요.

백만장자며, 완전 핫한 몸이며, 외계 세력으로부터 인류를 구원할 총장까지 갈 필요조차 없습니다. 우리 중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은 영감을 받아들이는 걸 어려워할지도 모릅니다: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 이것이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생각하는 동시에, "하루 중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객관적으로' 상당히 현실적인 가능성이 있다"고 대부분 동의를 할지라도 말입니다. 우리도 좋은 일이 가능하다는 건 알죠. 다만 그게 우리한테 가능하다고 여기지 않을 뿐입니다.

소설 속 다음 문장을 상상해 보십시오.

'오늘은 뭔가 좋은 일이 일어날 거야'라고 몽몽은 생각했다.

이것이 몽몽이 생각하는 전부라면, 몽몽은 반드시 좋은 일을 경험할 겁니다. 어쩔 수가 없습니다. 소설가는 그녀에게 그 어떤 '나쁜' 것도 투척할 수가 없습니다. 몽몽이 정말로 위의 문장과 같이 생각한다면 말이죠. 소설가가 몽몽에게 폭탄을 던진다고 하더라도, 몽몽은 여전히 이렇게 생각할 겁니다. "이런, 폭탄이잖아! 나의 용맹함을 증명할 절호의 기회로군!"

하지만 소설에서도 실제 삶에서도, 저런 문장 다음에 오는 내용은 대개 이러합니다:

하지만 그건 사실일 리 없었다. 그런 가능성을 생각했다는 자체가 몽몽이 참 멍청하다는 걸 보여주었다. 좋은 일이란 무작위로 일어나지 않았다. 그리고 정말이지, 좋은 일이 운명을 통해 일어나는 사람들에 몽몽은 속해 있지 않았다.

좋은 일이 생긴다는 영감을 받아들이는 대신, 몽몽은 좋은 일이 적용되는 사람들에게 자기는 포함될 리 없다는 걸 받아들였습니다. 그것이 그녀의 솔직한 시점입니다. 따라서 그녀에게 폭탄이 떨어진다면, '놀랍지도 않군. 안 좋은 일이 일어날 줄 알았다니까'라고 주장할 확률이 높습니다. 이것이 그녀의 솔직한 시점이니까요.


오해를 막기 위해 얼른 강조하자면: '이야기꾼'의 눈은 긍정병과 아무 관련이 없습니다. 이 세계관은 폭탄이 떨어질 때 좋아하는 척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세계관이 아닙니다.

페이지에는 거짓말이 통하지 않습니다. 물론, 아바타가 아바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있습니다. 겉보기에 존재하는 분리를 이용할 수 있어요. 하지만 우리 스스로에게는 거짓말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아바타가 이야기꾼에게, 혹은 이야기꾼이 아바타에게 거짓말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일단, 더 중요한 점은 몽몽이 자신의 시점 전체를 의식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아바타 세상의 우리 상당수, 그리고 다른 많은 소설 캐릭터들과 마찬가지로, 몽몽은 자신의 시점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 확률이 높습니다. 또는, 만약 시점을 눈치챈다면, 아마 그것이 '그녀의 머릿속'에 있고, '세상'은 '바깥'에 존재한다고 생각하고 있을 겁니다.

하지만 위의 예시를 다시 한번 보십시오.

몽몽의 시점은 어디에 있으며, 세상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것들은 내면 혹은 외면에 있지 않습니다. 내면이 외면입니다.

몽몽은 세상으로 둘러싸여 있지 않습니다. 몽몽이 세상입니다.

또 다른 예시입니다:

몽몽은 시끄러운 통근자들 사이를 헤집고 갔다. 이놈의 아침 교통, 아주 죽을 맛이었다. 온갖 방향에서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 진짜 무례한 자들은 아침 냄새를 풍겨댔다. 이조차 닦지 않았던 것이다.

"이보쇼." 누가 그녀 뒤에서 말했다. "좀 비키지?"

"장난해요?" 그녀가 말했다. "지금 어디 비킬 데가 없잖아요."

지하철 칸이 참으로 더웠다. 여름이란 대중교통을 사용하기에 이상적이지 못한 때였다. 몽몽은 여름이라면 질색이었다.

몽몽은 주변 환경이 거기 있기에 관찰할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내뱉은 말이 '다른 누군가'에게 들렸으니, 그것이 그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 독자들에게는 어떠합니까? (독자들이란 저자들처럼 이야기꾼입니다. 독자가 이야기를 읽음으로써, 이야기는 독자의 현실에 존재하게 됩니다.)

독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페이지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좀 비키지?"라는 단어들은 "온갖 방향에서 사람들이 밀고 들어왔다."를 구성하는 단어들과 다른 물질로 구성되어 있지 않습니다. 캐릭터인 몽몽에게는 전자가 '바깥으로부터' 들리고, 후자는 그녀 머릿속에서 펼쳐졌을 겁니다. (혹은, 다시 말하지만, 아마도, 후자가 자기 머릿속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것조차 모를 겁니다.) 하지만 독자들에게는? 그리고 저자에게는? 모든 것이 페이지 위에서 벌어졌습니다.

아바타 세상의 우리들도 이러합니다. 우리는 우리가 세상을 '본다'고 여깁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그 물질은 우리가 '생각하는' 물질과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생각하기가 곧 보기입니다. 시점—아바타가 일상적 의식으로 다다를 수 있는 모든 곳과 모든 때, 그리고 모든 곳과 모든 때에 다다를 수 있는 그것—의 모든 것은 동일한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페이지에 쓰인 모든 것이 시점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좋겠습니다. 그 시점에게는 어디든 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습니다. (빈 페이지의 힘에 접근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대개, 실제로 그렇게 하진 않습니다. 특화된 채로 있으며, 가끔은 우리가 알아차리지 못하는 방식으로 그러합니다.


'이야기꾼의 눈' 세계관의 재밌는 점은, 몽몽에게 너무나 힘이 있어서, 힘 없기로 결정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그녀는 자기의 소설가와 아무 상관도 없기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또한 세상이 자신으로부터 분리되어 있다고 결정할 수 있습니다. 사건은 그녀에게 닥치며, 그녀에게 대고 벌어집니다.

그리고 그녀의 그러한 말은 정확히 딱 맞는 말입니다. 소설가는 그녀의 이야기를 이에 부응해서 펼쳐줄 겁니다.

몽몽은 이렇게 말할 수도 있을 겁니다. 자기는 그저 객관적일 뿐이라고요. ("보세요! 객관적으로, 저는 아침 식사를 입냄새로 공개하는 저 작자와 분리되어 있잖아요!") 하지만 우리 독자들은 볼 수 있습니다. 입냄새가 고약한 자와 몽몽은 말 그대로 동일 물질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이야기꾼의 수준에서, 내면과 외면에는 차이가 없습니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 아바타의 시점 안에 있기 때문에) 이 비유와 흡사한 상황이 우리 세상에서 적용된다고 상상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영감에 대한 승낙이 그것이 실현되게 합니다. 우리의 시점이 그 영감으로 특화됩니다. 우리의 이야기꾼들은 우리 이야기들을 이에 부응하며 펼쳐줍니다.

'이야기꾼의 눈'을 사용하는 우리들은 소설 속에서 깨어나는 소설 캐릭터들과 같습니다.


세계관 태그는 이 순서대로 읽는 게 제맛입니다. 뒷선 내용에 앞선 내용이 필요합니다.